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라하의 봄 (문단 편집) == 배경 ==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며 [[제국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원투펀치를 맞은 유럽의 시민들은 이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도피처를 갈구하게 되었는데 [[소련]]의 [[독소전쟁]] 승전을 통해 확산된 [[공산주의]]도 이 중 하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된 [[중부유럽]]의 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신속하게 이 작은 나라의 적화를 진행시킬 프로젝트를 계획 및 진행했는데 그 프로젝트에는 비공산계 야당 탄압 계획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 1년간은 공산당이 레지스탕스를 주도한 업적도 있고 공산당의 지지율이 독일인 추방과 신속한 국유화로 높았기에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지만 이념적인 이유로 [[마셜 플랜]]을 거절하자 공산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1948년 총선에서의 패배로 실각이 확실시되었다. 결국 차선책으로 공산당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쿠데타]]를 모색했고 신생독립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음모의 책임을 야당 인사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으로 이들을 탄압하였는데 이에 반발하여 1948년 2월 국민사회당, 인민당, 민주당 등 야당 인사들이 공산당의 야당인사피소에 대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게 된다. 당연히 공산당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6인의 공화국 경찰간부를 모두 공산당 계통 인사로 갈아치워 이에 맞섰다. 의회의 다수파와는 달리 공산당 계통이 아니었던 공화국 대통령인 [[에드바르트 베네시]]와 그의 행정부는 의회에게 야당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의회는 이를 일축했다. 야당 인사들은 최후통첩으로 행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원 전원이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공산당은 되려 얼씨구나 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위기상황 선포&[[프라하]] 및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파업]] 투쟁을 일으키는 등 실력행사를 통하여 야당 의원 사퇴를 끝까지 거부하던 행정부를 "설득"시켜 일당독재 체제를 본격적으로 형성했는데 이 사건을 2월정변 혹은 '프라하의 쿠데타'라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승리는 곧 대규모 숙청을 암시하였고 머지않아 20만 명에 달하는 비공산계열 시민들이 직장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이러한 시민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념과는 관계없이 [[공산당]]에 입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머지않아 공산당 내부에서도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주의자 혹은 반스탈린주의자들이 쓸려나갔다. 이러한 정치적인 무질서, 그리고 비효율적인 공산주의적 통제경제가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냄에 따라 한때 번영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1956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뒤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안토닌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의 정체된 경제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으며, [[체코]] 지역에 비해서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었다. 60년대에 이르면 공급부족 상태가 만연하게 되며 그에 비례하여 지하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제난 속에 국민들은 점차 공산당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이은 실패에 의해 정부의 권위가 실추된 그 틈새로부터 정부 비판 여론이 다시금 쇄도하기 시작했는데 지식인과 문학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숙청작업과 경제계획을 비판하고 이러한 내용에 대해 일단의 당 관료들조차 수긍하게 되자 공산당은 결국 [[수정주의]]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웃 나라인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서는 1968년 1월 1일 헝가리 사회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신경제메커니즘('''N'''ew '''E'''conomic '''M'''echanism, 헝가리어: Új gazdasági mechanizmus)'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모델은 정부의 경제 개입 제한, 그리고 [[시장경제]]의 원리 도입을 그 골자로 하였다. 둡체크가 집권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를 본받은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바람을 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유주의의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동'스러운 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1967년 12월에 프라하를 방문하여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였던 노보트니[* 대면 당시 그를 향해 불신임 제스쳐를 팍팍 보냈다.]와 동시에 다른 유망인물들 또한 대면하였는데 그는 이 과정에서 만난 [[알렉산데르 둡체크]](이하 둡체크)에게 유독 호감을 표시하였다. 둡체크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란 엔지니어 출신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여 급성장한 인물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둡체크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의 기대와는 반대로 둡체크는 보다 더 급진적인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당해 3월부터 개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개혁운동과 함께 과거의 실패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정부의 언론 검열 제도가 폐기된 데 기인하며 '''언론·집회·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자유가 회복된만큼 시민사회도 재활성화되었다. 과거 정치적인 문제로 숙청된 인사들도 사회에 활발하게 복귀하여 사회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공산당 내부에도 인사교체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 주요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경제 수정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개혁안에 대해 [[바르샤바 조약기구]] 측은 즉각 반발하였으며 5월에 모스크바에서 둡체크를 배제한 채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한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 합동훈련을 개최함으로서 일련의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가시적인 채찍을 함께 활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안보상의 위협을 느낀 둡체크를 비롯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인사들은 소련과의 독대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에서의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맹세를 하였으나 이와는 별개로 소련 측의 개혁 프로그램 포기 요구는 거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